한국인은 신라의 후손일까, 고구려의 후손일까?
우리는 누구의 후손일까?
한민족의 뿌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질문이 바로 이거다.
"한국인은 고구려의 후손일까, 신라의 후손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선다.
혈통, 문화, 정치 체제, 정체성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질문이다.
민족 정체성과 국가의 문화 기반,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차분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정치적·제도적 계승자는 '신라'
역사적으로 한국의 국가는 통일신라를 계승한 '신라계 국가'의 흐름을 따라간다.
668년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남북국 시대가 열렸다.
그 이후 고려는 신라의 지배층과 제도를 상당 부분 흡수하면서 건국되었고,
조선 역시 고려의 틀을 계승하여 이어졌다.
즉, 정치적 흐름에서 보면 고구려보다는 신라가 주류였던 셈이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존속한 나라였고,
통일 이후 비교적 안정된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행정 조직, 관료제도, 지방통치 체계, 교육제도,
불교와 유교의 혼합 구조 등은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이 형식적으로나마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제 정치 시스템과 사고방식은 신라의 것을 닮았다.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문벌 중심의 체계,
농본주의적 사고 등은 모두 신라에서 발현되기 시작한 전통이다.
2. 문화적 DNA 역시 신라가 주도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많은 문화유산—불교 사찰, 탑, 금속공예,
무덤 구조, 심지어 향가와 같은 문학—
이 대부분 신라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역시 웅대한 벽화, 전쟁 영웅, 천하통일의 기상 등
인상적인 문화적 상징을 남겼지만,
그 문화는 발해로 이어졌다가 소멸되었다.
반면, 신라는 삼국통일 후 문화의 주도권을 잡았고,
그 흐름이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다.
즉, 고구려가 정신과 상징의 유산이라면, 신라는 제도와 일상의 유산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사회 조직, 가치관,
정서적 태도에는 신라적 특징이 더 뚜렷하게 남아 있다.
3. 그러나 고려와 조선은 ‘고구려의 후예’이고자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있다.
역사적으로 계승은 신라를 따랐지만,
심정적·상징적 정체성은 고구려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고려의 건국자 왕건은 국호를 ‘고구려’의 음을 따서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칭 이상의 의미였다.
왕건은 고구려의 영광과 기상을 계승하고자 했고,
실제로 고려 전기에는 북진정책을 통해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다만 의지의 영역이지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야한다.
조선 역시 고구려에 대한 동경을 이어나갔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고구려를
"만주까지 영토를 넓혔던 위대한 조상"으로 칭송했고,
고구려의 인물들(예: 을지문덕, 연개소문, 온달)을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살았던 조선 사회는 오히려
신라의 보수적이고 정착적 문화를 더 많이 닮았다.
이처럼,
한국인의 마음속에서는 고구려의 기상을 동경하면서도,
실제 생활과 제도, 정신은 신라의 틀을 따르는
복잡한 정체성이 자리잡게 된다.
꿈과 희망은 고구려인데
실제 모습은 신라인 셈이다.
4. 고구려는 유목성과 팽창성의 상징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아우르며,
강력한 군사력과 활발한 외교·전쟁 활동으로 유명했다.
말 그대로 팽창적이고 외향적인 국가였다.
- 군사 중심 사회: 활발한 정복 활동과 전투 위주의 정치 문화
- 유목성과 개방성: 북방계 유목 문화의 영향과 자유로운 기상
- 초국가적 영토 인식: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요동까지 영토로 삼았음
이는 후일
몽골, 여진, 만주족의 흥망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한민족 역사상 드물게
'대륙적 기상'을 실현한 국가였다.
5. 신라는 농경·정착 사회의 전형
반면, 신라는 금관가야와의 통합 이후 한반도 남부의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발전한 국가였다.
- 중앙집권적 체제: 골품제도, 관등제 등 질서와 위계 중심의 사회
- 불교와 유교의 융합: 문화적 수용과 변용 능력이 뛰어남
- 보수적이고 정착적인 성향: 전통, 가문, 혈통 중심의 문화
신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었고,
그로 인해 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단단한 내실과 질서 위주의 구조는 이후
고려와 조선의 토대가 되었으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행정 시스템과
관료주의적 경향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6. 발해는 고구려의 진짜 후계자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세운
발해는 실질적인 고구려의 후계 국가였다.
고구려의 문화, 지배층, 관료제도, 불교 신앙 등이 계승되었고,
발해 스스로도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했다.
발해가 곧 고구려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발해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문화·정치적으로는
당나라 및 북방 유목 민족들과 더 많은 교류를 했다.
또한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은 여진, 거란, 몽골로 흩어졌다.
물론 일부는 고려로 흡수되었지만,
고려의 주류를 형성하진 못했다.
이 때문에 발해의 고구려 유산은 한국 문화의 핵심 흐름으로 직접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7. 결론: 한국인은 신라의 후손이지만, 고구려의 꿈을 꾼다
한국인의 역사적·제도적·문화적 기반은 분명히 신라에 가깝다.
신라의 안정성과 질서, 농경 사회의 정착성, 중앙집권적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무의식, 상징의 세계, 민족적 자존심에는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이 살아 숨 쉰다.
고구려는 우리가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 이상향, 혹은 정신적 원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를 기억하고 싶어 하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허나 한국인은 신라의 후손이다.
동시에 고구려를 동경하며 살아가는, 신라적 시스템 속의 고구려적 정신을 가진 민족이기도 하다.
그 두 전통의 긴장과 조화 속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