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흔히 불쌍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그려진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은 186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의 왕이었고, 1895년부터 1897년은 대조선국 군주(사실상 조선과 동일)이고
1897년부터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의 황제였다.
일본과 서방이 본격적으로 쳐들어온 시기를 빼더라도 고종에게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고
1인자로 군림한 게 46년이나 된다.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이 9번이나 나오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 시기동안 고종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외세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기만 했다.
왜 고종은 이토록 무능력했을까?
간단하다.
고종에게 조선은 국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조선은 그저 자신의 개인 소유물에 불과했으며, 백성은 자신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었다.
국가와 백성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사치스러운 삶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의 탐욕과 무능함은 조선을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몰고 갔다.
개혁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국가 자원을 팔아 자신의 금고를 채웠으며, 백성을 더욱 가혹한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그는 나라가 무너지는 순간까지도 끝없는 사치와 향락을 멈추지 않은 최악의 군주였다.
고종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글을 더 읽어보자.
여기 5가지 놀라운 고종에 대한 사실들이 있다.
1. 조선을 무장 해제시키고 국방력을 약화시킨 왕
고종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철저히 무장 해제했다.
- 조선은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 함대에 맞설 수 있는 수준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 하지만 고종은 국방보다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무위소’에 모든 병력과 군비를 집중시켰다.
- 이로 인해 조선의 실질적인 방위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외세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결국,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고,
이를 막을 힘조차 없는 약한 나라로 전락했다.
2. 학정을 저지르는 데 외국 군대를 이용한 왕
고종은 백성을 보호해야 할 왕이었지만,
오히려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들을 학살했다.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 이후 일본군까지 개입하며 조선은 자국 내에서 청·일 양국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 1896년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 이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까지 끌어들이며 조선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백성들의 저항과 개혁 요구에 대응하기보다는,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는 데 급급했던 무책임한 군주였다.
3. 경제를 붕괴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왕
고종의 무능한 경제정책은 조선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1) 대책 없는 화폐개혁 – ‘백동화 폭락 사건’
- 1894년, 고종은 새로운 화폐인 백동화를 대량 발행했지만,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가 무너졌다.
- 백동화의 가치는 급락했고, 백성들은 생필품을 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 이로 인해 시장이 혼란에 빠지고, 민생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2)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
- 부족해진 국고를 메우기 위해 환곡 제도를 악용하여 더욱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 심지어 통나무, 우뭇가사리까지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3) 자신의 사치를 위해 국가 재정을 탕진
- 자신의 생일잔치를 위해 폐선을 사들이고, 궁궐을 확장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 궁궐 중건에 국가 재정을 낭비하면서, 관리들의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그러면서도 고종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빌려준 돈을 국가가 갚으라고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 국가를 자신의 사유 재산처럼 여기며, 조선을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매천 황현은 **“고종이 탁지부를 공물로, 내장원(황실 재정)은 자기 개인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의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4. 개혁 세력을 몰살시키고, 부패한 친인척들로 조정을 채운 왕
고종은 조선을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로막았고, 충신들을 제거하는 데 힘을 썼다.
- 개혁을 주장하는 대신들은 목숨 걸고 상소했지만, 고종은 이를 묵살했다.
- 개혁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반역자로 몰려 처참히 몰살당했다.
-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조정을 구성하며, 부패한 친인척들이 조선을 농락하도록 방치했다.
결국,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완전히 부패했고,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막을 힘조차 없는 허약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5.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고도 호의호식한 왕
고종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 을사조약(1905) 체결 당시, 고종은 자신의 지위와 안전을 약속받는 조항만 신경 썼다.
-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도,
그는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사례금을 받고 평온한 생활을 유지했다. - 을사조약 체결 6일 전, 일본 공사는 고종에게 2만 원(현 시세 약 25억 원)의 기밀비를 지급했다.
- 그는 나라를 지키려는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않고, 조선을 일본에 넘긴 대가로 돈을 챙겼다.
조선이 사라진 후에도 고종과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국가와 백성을 일본에 넘기고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집중한 것이다.
결론 – 고종이야말로 조선을 망친 원흉이다
✔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외세에 의존하여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 백성을 학살하는 데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 화폐 개혁 실패로 경제를 붕괴시키고, 무리한 세금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 궁궐 확장과 사치에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 개혁을 막고, 부패한 친인척들로 조정을 채워 국가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 을사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조선을 팔아넘겼다.
✔ 나라가 망한 후에도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고종은 결코 비운의 황제도, 개혁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조선을 무너뜨린 가장 큰 원흉이었다.
우리는 고종을 통해 무능한 지도자가 어떻게 국가와 백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분명히 보았다.
그의 탐욕과 사치는 조선을 폐허로 만들었고, 결국 500년 왕조를 일본에 바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는 조선의 왕들을 똑바로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왕을 무조건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느라 그들의 무능력함과 부패를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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