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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심리과 역사

성리학의 확산과 여성의 몰락 – 고려의 평등에서 조선의 착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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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남녀차별이 본격적으로 심해진 것은 조선 시대부터였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았고, 법적으로도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여성의 지위는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조선이 안정기에 접어든 15~16세기 이후부터는 여성 차별이 심각해졌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즉, 성리학의 확산은 여성들에게는 곧 억압과 착취, 그리고 권리의 박탈을 의미했다.


여성을 억압한 가장 강력한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이는 조선 내내 여성들을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 고려 시대 – 남녀평등의 흔적이 남아 있던 사회

고려 시대까지는 여성도 법적으로 중요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도 재산을 상속받았다.

  • 고려에서는 부모의 유산을 자녀에게 고르게 나누어주는 균분상속제가 시행되었다.
  • 즉, 아들과 딸이 유산을 동등하게 받을 수 있었다.

여성이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다.

  • 고려에서는 여성도 법적으로 가문의 대표가 될 수 있었으며, 가정 내에서 상당한 권한을 가졌다.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웠다.

  • 고려 사회에서는 이혼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재혼이 가능했고, 과부가 된 여성이 다시 결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처가살이 문화

  • 고려 시대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 들어가 사는 처가살이 문화가 존재했다.
  • 이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친정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한 제도였다.

즉, 고려 시대까지는 여성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2. 조선 시대 – 성리학의 확산과 여성의 몰락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이 국교처럼 자리 잡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급격히 추락했다.

(1) 여성의 재산권 박탈 – 균분상속제 폐지

  • 성리학에서는 가족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재산권이 박탈되었고, 균분상속제가 폐지되었다.

 

  •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전통이 남아 있어 딸들도 유산을 받을 수 있었지만,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재산은 아들에게만 상속되었고, 여성은 법적으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2) 여성의 외출 금지 – ‘칠거지악’과 ‘남녀유별’

  • 성리학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 조선 사회에서는 남녀유별(男女有別) 사상이 강조되면서, 여성이 외출하는 것조차 제한되었다.

 

  • 특히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법이 도입되면서, 여성이 이혼당할 수 있는 이유가 7가지나 규정되었다.
    • 남편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우
    •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
    • 질병이 있는 경우
    • 간통한 경우
    • 말이 많거나 남편을 험담한 경우
    • 도둑질한 경우
    • 시댁과 갈등이 있는 경우
  • 반면, 남성이 바람을 피우거나 폭력을 행사해도 여성은 이혼할 권리가 없었다.

 

(3) 과부 재혼 금지 – 여성을 남편의 부속물로 만들다

  • 고려 시대에는 과부가 재혼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 성리학에서는 ‘열녀(烈女)’라는 개념을 만들어,
    여성이 남편이 죽어도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 만약 과부가 재혼하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난을 받았으며, 가족까지 연좌제로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

 

  • 이러한 억압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심해져,
    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열녀문(烈女門)을 세워주는 악습까지 생겨났다.

 

 

3. 임진왜란 이후 – 남존여비 사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다

 

조선 사회에서 남녀차별이 가장 극단적으로 심화된 시점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며 조선은 사회적 혼란을 겪었고, 유교적 질서를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조선 후기에는 "여성은 더욱 조용하고 순종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면서,
    여성은 더 이상 독립적인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의 부속물처럼 취급되었다.

 

  • 여성들은 더욱 강한 억압을 받으며 가정에 갇혀 살아야 하는 존재로 고착되었다.

4. 성리학은 여성들의 적이었다

결국, 성리학은 남성 중심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성을 철저히 희생시킨 사상이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성리학적 가치는 조선 내내 유지되었고,


이는 근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 차별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 고려 시대에는 여성도 경제적 자립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법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 고려 시대에는 과부도 재혼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평생 정절을 강요받았다.
  • 고려 시대에는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남성만이 가족을 대표했다.

이처럼 성리학의 확산은 여성을 사회에서 배제하고, 남성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는 여성을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처럼 취급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결론 – 조선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여성의 자유는 사라졌다

고려까지는 남녀평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처럼 받아들이면서 여성 차별이 심해졌다.


임진왜란 이후, 남존여비 사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성리학은 여성들에게는 억압과 차별을 강요한 적(敵)이었다.

 

결국,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독이 되었고, 여성들의 권리를 철저히 박탈한 사상이었다.


고려 시대의 평등한 흔적을 되찾고,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려면


이제는 성리학적 잔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리학은 현재 이란의 이슬람보다도 더 악독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성리학은 조선 시대 여성은 3류 국민으로 만들었고

 

성리학은 조선이 일본이 식민지가 되게 만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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